이화의료역사이야기
로제타 셔우드 홀이 만든 한국 최초 한글 점자 교재
2023년 10월 개관한 이대서울병원 지하1층의 ‘이대동대문병원역사라운지’ 빛기둥 옆 한쪽 벽면에는 역사라운지 조성에 뜻을 함께한 기부자들의 이름을 새겨 놓은 도너월(Donor's wall)이 있다. 그런데 이 도너월에 새겨진 기부자들의 이름은 한글 뿐 아니라 점자로도 표기되어 있다. 이렇게 기부자들의 이름을 점자로까지 표기한 것은 우리나라 최초로 특수교육을 시작한 로제타 셔우드 홀(Rosetta Sherwood Hall)의 시각장애인에 대한 사랑을 기념하기 위해서이다. ‘한국 특수교육의 어머니’라고도 불리는 로제타 홀은 언제부터 어떻게 이들에 대한 관심과 지원 활동을 보였던 것일까?
1894년부터 남편 윌리엄 제임스 홀(William J. Hall)과 함께 평양에서 활동을 시작한 로제타 홀은 그곳에서 많은 시각・청각 장애인들을 만났다. 이 장애인들이 제대로 된 교육만 받는다면 장애를 극복하고 자립하여 생활할 수 있었지만 당시 조선은 장애인들에 대한 특수교육이 체계화되지 못한 상황이었다. 로제타 홀은 눈먼 아이들을 돕기 위한 방도를 마련하고자 했으나 잘못하면 1888년 유포되었던 “의사들이 약을 만들기 위해 아이들의 눈을 뽑았다.”라는 소문처럼 모함을 받을 수 있었기 때문에 쉽사리 어떠한 행동을 옮기기가 힘들었다.
이같은 상황에서 평양의 독실한 개신교 신자였던 오석형의 딸 오봉래를 만났는데 그녀는 맹인이었다. 로제타 홀은 총명하고 배우려는 열정이 가득했던 오봉래를 위해 맹인교육에 대한 전문적인 지식을 습득해야겠다는 마음을 먹었다. 그러던 중 남편 윌리엄 홀이 평양에서 발발한 청일전쟁의 부상자들을 치료하다 발진티푸스에 걸려 1894년 11월 24일 사망하자 지친 심신을 추스리기 위해 미국으로 돌아갔다.
로제타 홀은 미국에서 남편을 잃은 슬픔을 이겨내며 다시 한국으로 돌아가 활동할 준비를 했는데 그 중 하나로 맹인교육을 위한 점자에 대해 알아보기 시작했다. 당시 점자는 프랑스의 루이 브라이(Louis Braille)가 1824년 개발한 6점식 점자와 뉴욕의 윌리엄 웨이트(William B. Wait)가 1860년 개발한 ‘뉴욕 포인트’(New York Point)가 대표적이었다. 로제타 홀은 웨이트 원장을 직접 찾아가 점자 구조를 배우고 여러 점자와 비교한 결과 ‘뉴욕 포인트’가 한국어에 가장 적합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리고는 1897년 한국으로 돌아와 뉴욕 포인트를 사용한 4점식 한글 점자를 개발해 기름 먹인 두꺼운 한지에 바늘로 구멍을 내어 한글 학습 교재인 《초학언문》의 일부를 점자책으로 만들었다.
《초학언문》은 1890년 10월 로제타 홀이 조선에 처음 입국했을 때 함께 파견되어 와 감리교 선교사로 활동하던 마가렛 벵겔 존스 부인(Margaret J. Bengel Jones, 1869~1962)이 1895년 간행한 기독교 교리서이자 한글 학습서로 배재학당 교과서로도 사용 중인 책이었다. 아직 국민들을 대상으로 한글 교육이 체계적으로 이루어지지 않았던 19세기 조선 땅에서 기독교 선교사들은 기독교 교리와 근대 세계에 대한 지식 보급을 위해 자체적으로 한글 학습 교재를 편찬해 사용하고 있었다. 따라서 한글의 기본적인 자음과 모음부터 학습해야 했던 맹인들에게 있어서도 《초학언문》은 유용한 교재였을 것이다.
《로제타 홀 한글점자 교재》라 불리는 이 점자책은 1926년 박두성이 《한글점자 훈맹정음》(6점식)을 창안하기 전까지 시각장애인을 위한 교재로 사용되며 우리나라 시각장애인 특수 교육에 있어 상징적인 의미를 갖게 되었다. 이에 문화재청은 2022년 이 책의 역사적 가치를 인정하여 국가등록문화재로 지정하였다.
로제타 홀은 자신이 만든 점자책을 가지고 1898년 평양으로 가 오봉래를 가르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진도가 느렸지만 일년 만에 오봉래는 홀이 준비한 모든 교재들을 읽을 수 있었다. 오봉래가 읽고, 쓰고, 뜨개질까지 하자 많은 사람들이 놀라며 자신이 아는 맹인 소녀들을 로제타 홀에게 소개했다. 그렇게 1900년 1월 평양 광혜여원 내 이디스 마가렛 어린이 병동의 방 한 칸에서 조선 최초의 맹인 학교가 출발하였다.
자신의 일생 대부분을 조선에서 소외되고 어려운 이들을 돌보는데 바친 로제타 홀의 행보를 기억하며 이화의료원은 앞으로도 로제타 홀이 보여준 ‘섬김과 나눔’의 가치를 계속해서 이어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