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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화의료역사이야기

제국여자의학전문학교 1회 졸업생 한국인 여의사들

파일 역사.jpg       
작성일 2025-02-10 조회수 758


로제타 셔우드 홀(Rosetta S. Hall) 의사가 1928년 경성에 조선여자의학강습소를 열기 전까지 의사의 꿈을 가진 한국인 여성들은 경성의학전문학교의 청강생으로 입학하거나 일본, 중국, 미국 등 해외로 유학을 가야만 의학 공부를 할 수 있었다. 다만 경성의학전문학교의 경우 규정에 따르면 입학자격에 있어 성별의 제한이 명시되어 있지는 않았으나 암묵적으로 여학생을 받지 않았으며 1914년부터 로제타 홀의 요청으로 일부 여학생에 한해 청강생 입학을 허용했을 뿐이었다. 따라서 한반도 땅 안에서 여학생들이 의학 교육을 받는 것은 너무나 어려웠기에 1910~20년대 의학 공부를 원한 여학생들 대부분은 여자 의과대학이 있는 일본으로 유학을 가는 방법을 택하였다.


1910-20년대 의학 공부를 위한 한국 여성들의 해외 유학지는 1900년 개교한 일본 최초의 여성 의학 교육기관인 동경여자의학전문학교에 집중되었다. 그러다 19254월 형제 의사였던 누카타 유가타(額田豊), 누카타 스스무(額田晉)가 도쿄 에바라군 오오모리마치(東京府荏原郡大森町)에 새로운 여성 의학 교육기관인 제국여자의학전문학교(이하 제국여의전, 1930년 제국여자의학약학전문학교로 개칭, 현 토호대학東邦大學)를 세우고 부속병원을 함께 열었다.


5년제(예과 1, 본과 4) 교육과정의 제국여의전이 개교하자 첫 입학생 모집에서부터 한국인 여학생들이 지원해 합격하였다. 그리고 1930년 거행된 1회 졸업식에 3명의 한국인 여학생들이 포함되었으니 김용희, 장문경, 문순성이 그들이었다. 이들 세 명의 여의사를 필두로 1930년부터 1944년까지 제국여의전을 통해 배출된 한국인 여의사는 총 36명이었다. 이는 동경여자의학전문학교에 이어 두번째로 많은 여의사 배출 인원이었다.


로제타 셔우드 홀(Rosetta S. Hall) 의사가 1928년 경성에 조선여자의학강습소를 열기 전까지 의사의 꿈을 가진 한국인 여성들은 경성의학전문학교의 청강생으로 입학하거나 일본, 중국, 미국 등 해외로 유학을 가야만 의학 공부를 할 수 있었다. 다만 경성의학전문학교의 경우 규정에 따르면 입학자격에 있어 성별의 제한이 명시되어 있지는 않았으나 암묵적으로 여학생을 받지 않았으며 1914년부터 로제타 홀의 요청으로 일부 여학생에 한해 청강생 입학을 허용했을 뿐이었다. 따라서 한반도 땅 안에서 여학생들이 의학 교육을 받는 것은 너무나 어려웠기에 1910~20년대 의학 공부를 원한 여학생들 대부분은 여자 의과대학이 있는 일본으로 유학을 가는 방법을 택하였다.


1910-20년대 의학 공부를 위한 한국 여성들의 해외 유학지는 1900년 개교한 일본 최초의 여성 의학 교육기관인 동경여자의학전문학교에 집중되었다. 그러다 19254월 형제 의사였던 누카타 유가타(額田豊), 누카타 스스무(額田晉)가 도쿄 에바라군 오오모리마치(東京府荏原郡大森町)에 새로운 여성 의학 교육기관인 제국여자의학전문학교(이하 제국여의전, 1930년 제국여자의학약학전문학교로 개칭, 현 토호대학東邦大學)를 세우고 부속병원을 함께 열었다.


5년제(예과 1, 본과 4) 교육과정의 제국여의전이 개교하자 첫 입학생 모집에서부터 한국인 여학생들이 지원해 합격하였다. 그리고 1930년 거행된 1회 졸업식에 3명의 한국인 여학생들이 포함되었으니 김용희, 장문경, 문순성이 그들이었다. 이들 세 명의 여의사를 필두로 1930년부터 1944년까지 제국여의전을 통해 배출된 한국인 여의사는 총 36명이었다. 이는 동경여자의학전문학교에 이어 두번째로 많은 여의사 배출 인원이었다.


그렇다면 제국여의전을 1회로 졸업한 이 세 명의 한국인 여의사들은 어떤 사람들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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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희(金龍喜, 1906~1988)는 서울 출생으로 1924년 경성여자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였다. 이후 의사가 되기 위해 일본으로 유학을 가 제국여의전에 입학, 1930년 졸업하고 귀국하였다. 1933년 선배 여의사였던 정자영이 운영하던 경성 수은동 92번지 진성당의원 자리에서 내과, 소아과, 산부인과 진료를 보는 병원을 개업하였으며 이후 천연동 117-3번지에 부인병원을 열었다. 동대문부인병원과 적십자병원에서도 근무한 바 있었다. 김용희 의사가 개원한 천연동의 병원은 현재도 며느리 남소자 의사에 의해 이어지고 있다.


장문경(張文卿, 1904~1988)은 경남 진주 출생으로 어머니의 교육열 덕분에 일본에 유학을 갈 수 있었다. 17세 때 일본으로 유학을 가 정화고등여학교를 마친 뒤 1925년 새로 개교하는 제국여의전에 입학하여 19301회 졸업식 때 수석으로 졸업하였다. 졸업 후 제국여의전 부속병원에서 근무를 하다 고국으로 돌아와 경성의전 병원에서 1년여간 실습을 하였다. 이후 1933년 경성 관훈동 195번지에 정화(精華)의원(산부인과)을 개업하여 1975년까지 운영하며 장안의 손꼽히는 명의로 이름을 날렸다. 정화의원으로 사용하던 건물은 당시의 모습을 그대로 유지한 채 현재 관훈갤러리로 사용 중이다.

장문경 의사는 일제강점기 매일신보, 조선중앙일보, 조선일보, 동아일보등 주요 신문에 여성건강, 위생, 아동건강 등을 주제로 하는 다수의 칼럼들을 게재하였으며, 조선보육협회, YWCA 등에서 개최하는 위생강연회 강연 활동도 펼쳤다. 해방 후 1947년 서울보건부인회 결성에도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하였으며, 대한여자의사회 4대 회장(1963~1965)도 역임하였다. 장학 사업에도 관심이 깊어 일찍부터 대학생들을 데려다 숙식과 학비를 대주었는데, 198311월에는 사재 2억여원을 출연하여 장문경 장학재단을 설립하였다.


문순성(文郇城)은 제국여의전을 졸업하고 제국여의전 부속병원에서 부인과와 소아과를 수련한 후 귀국하여 193012월 전라남도 영암군 동무리에 병원을 개업했는데 이 병원은 여의사가 영암군에 개원한 첫번째 병원으로 지역민들에게 큰 환영을 받았다. 이후 문순성 의사는 일본의과대학 출신으로 1931년부터 여수 서정(西町)에서 중앙의원을 운영중이던 남편 조주환(曹軴煥)과 함께 이 병원에서 산부인과, 외과 진료활동을 펼쳤다. 해방 후에는 1949년 대한부인회 여수군 지부 부지부장으로 활동하였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제국여의전을 1회로 졸업한 여의사 3명은 의사가 된 후 활발한 의료 활동을 전개하며 여성 환자 진료 및 지역 의료 발전에 큰 공헌을 한 것은 물론 사회활동도 병행하였다. 의사가 되겠다는 일념 하나로 해외 유학을 떠난 것과 더불어 아무런 사전 정보가 없는 신생 학교에 입학해 학업을 이어갔던 이들 3인방의 모습은 실로 용기있는 행보였다고 할 수 있겠다. 아마도 한국인으로서 제국여의전의 문을 연 이들의 행보는 이후 의사를 꿈꾸고 있던 또 다른 한국인 여학생들의 입학 활로가 넓어지는데 공헌을 했으리라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