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화의료역사이야기
메리 커틀러 의사의 이동순회진료 활동
교통시설의 발달로 전국이 1일생활권이 된 21세기 현재 한국 사회에도 여전히 의료기관과의 접근성이 떨어져 의료 혜택을 받기 어려운 지역의 거주민들, 소외계층 주민들을 위한 이동순회진료가 전국 곳곳에서 진행되고 있다. 그렇다면 한국에서는 언제부터 이동순회진료가 시행되었을까?
이 차는 메리 커틀러(Mary M. Cutler) 의사가 1925년 한국에 들여온 포드(Ford) 트럭이다. 사진에서 볼 수 있듯이 차 옆 쓰여있는 ‘위생교육 예수교진찰소(衛生敎育 耶蘇敎[야소교]診察所)’라는 문구는 이 차가 구체적으로 어떤 용도로 사용되었는지 짐작케한다.
메리 커틀러는 1893년 조선에 입국하여 43년간 조선인들을 위한 의료 서비스 제공과 의료 환경 개선 및 여성의학교육에 앞장섰던 의료 선교사였다. 보구녀관에서 활동을 시작한 커틀러 의사는 당시 쉬는 날이면 보구녀관 인근의 한양 도성 주변을 돌아보며 조선 사람들의 주거환경과 환자들을 살펴보았으며 기회가 닿을 때마다 지방으로 순회진료를 다니기 시작했다. 아마도 커틀러는 이 때부터 의료 혜택을 받기 힘든 이들을 위한 이동순회진료활동에 관심을 가진 것 같다.
커틀러는 1922년 9월 평양 광혜여원에서의 활동을 마친 후 미국으로 돌아가 지친 몸과 마음을 회복하고 1925년 다시 한국으로 돌아오는 길에 위 사진 속 차량을 가지고 왔다. 서울에서 차량을 순회진료용으로 개조한 후 차량을 운행할 수 있는 운전기사를 확보하고 서울, 제물포, 수원 등지를 돌며 환자들을 돌보고 공중보건 강연을 진행하였다.
1925년 11월 순회진료 트럭과 함께 평양으로 돌아온 커틀러 의사는 12월 차량 운행 면허증과 이동진료소 허가증을 받고 17일부터 본격적인 활동을 전개하였다. 커틀러 의사가 제일 먼저 찾아 간 곳은 평양 시내에서 20리 정도 떨어진 곤양(현 평양시 강남군 강남읍)이라는 지역으로 이 곳에서 그는 3일간 진료활동을 펼쳤다. 커틀러의 이동순회진료가 한국에서 행해진 첫번째 사례는 아니었으나 전용차를 가지고 지속적으로 진행되었다는 점은 이전의 것과 차별성을 가진다.
1920~30년대 이동순회진료는 열악한 도로 사정과 예상치 못한 비바람 등의 날씨 등을 헤쳐가며 진행되고 있었다. 당시 이들의 어려움은 커틀러가 쓴 보고서에도 잘 드러나 있다.
“추운 날씨에는 마을에서 방을 빌려 차에 짐을 싣고 그곳에서 먹고자고 환자들을 돌봐야 했는데,
그 중 상당수는 우리 차로는 접근할 수 없는 마을에서 1~10마일 떨어진 곳에서 온 환자들이었다.
(중략)
밤이 되자 직원 두 명이 침구를 챙겨 마을에 숙소를 찾았다. 간호사와 나(커틀러)는 차에서 잤다.
저녁과 아침은 차 근처 야외에서 요리를 했지만 간단한 점심조차 먹을 기회가 거의 없었다.
우리는 상주 의사가 없는 마을에만 갔다. 큰 마을도 자동차 도로에서 벗어난 경우가 많기 때문에
우리는 차를 덮개로 묶어두고 걸어서 환자를 치료하기 위한 용품을 며칠에 걸쳐 1마일 또는 그 이상의 거리로 이동시켰다.”
(1926년 한국감리교여선교회 Annual Report 중)
“자정 무렵 바람이 불어 음식, 연료, 조리도구, 여행가방 등을 보관하고 환자들의 대기실로 사용하던 텐트가 날아갔다.
(중략)
번개가 번쩍이고 천둥이 치는 동안 우리 세 사람은 복장도 제대로 갖추지 않은 채 비가 쏟아지기 전 모든 물건을 교회 안으로 옮겼다.
겁에 질린 간호사는 차 안에서 이불을 뒤집어쓰고 머물러있었다.
그곳에 머무는 동안 우리는 교회를 부엌, 식당, 대기실로 사용하면서
차 안에서 환자들을 계속 치료하고 약을 조제해야 했다.”
(1929년 한국감리교여선교회 Annual Report 중)
보통 이동순회진료에는 커틀러 의사와 간호사, 전도부인, 운전수 등 총 4명이 함께 다녔는데 커틀러와 간호사는 환자들을 치료하는 일을, 전도부인과 운전수는 환자들을 불러모으는 일을 하였다. 당시 60대였던 커틀러가 장거리 여행과 노천활동이 동반된 이동순회진료를 다닌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러나 아픈 사람은 누구나 어디에 살고 있든 진료를 받아야 한다는 것, 사람들에게 기본적인 보건지식을 가르쳐 자신의 건강을 지킬 수 있도록 해주어야 한다는 신념을 가진 커틀러는 이 사업을 10년 이상 지속하였다.
커틀러가 순회진료를 하며 만난 환자들은 눈병, 골절에서부터 기관지 폐렴, 위험한 농양, 이질, 디프테리아 등의 중증 질환까지 다양한 질병을 가지고 있었다. 커틀러는 순회진료만으로 치료가 어려운 환자들은 평양연합병원에서 치료를 받을 수 있도록 연계해 주기도 하였다. 그리고 모든 진료 기록은 정부 당국에 보고되었다.
공중보건 위생교육사업의 경우 1910년대 후반부터 서울의 동대문부인병원(릴리안해리스기념병원)과 태화여자관에서 관련 활동을 활발하게 전개했는데 커틀러 역시 환자의 진료 뿐 아니라 한국인들의 의료지식 함양에 관심을 가지며 순회진료활동시 공중보건 교육에 많은 공을 들였다. 건강 증진과 질병 관련 지식의 효과적인 전달을 위해 커틀러는 환등기 상영, 영화 상영, 포스터 전시, 강연회 등의 방법을 활용하였다.
커틀러 의사의 이동순회진료활동 모습과 내용이 담긴 보고서(Woman's Missionary Friend, 1926년 12월호)
이처럼 열정적인 커틀러의 활동에 지역 주민들도 적극적으로 환호하며 재방문 요청, 정기적인 방문 요청, 감사의 메세지 등을 보냈으며 새로운 지역에의 방문 요청 또한 쇄도하였다. 커틀러는 이같은 한국인들의 반응에 이 사업을 더 적극적으로 펼칠 동력을 얻을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한편 커틀러는 이동순회진료활동이 한창 진행중이던 1931년 6월 14일 개성 북부교회에서 개최된 한국 감리교 최초 여성 목사 안수식에서 목사 안수를 받았다. 이후 1933년 감리교여성해외선교회(W.F.M.S.) 선교사직을 사임하고 독립적인 선교활동을 전개하였으며 이동순회진료활동은 1936년경까지 지속하였다.
20대에 낯선 땅 한국에 와 70대가 되어 고국에 돌아간 커틀러가 한국에서 했던 일은 보통 사람들이 하고 싶어하지 않고 하기 어려운 일이지만, 누군가는 꼭 해야하는 필요한 일이었다. 이화의료원은 이같은 커틀러 의사의 정신을 이어받아 누군가는 해야하는 일이고 내가 그 일을 할 수 있다면 어려움이 있더라도 용감하고 진취적으로 그 일을 헤쳐갈 때 이 세상이 한 걸음 더 도약할 수 있으며 그 활동이 좀 더 좋은 사회로 나아가는데 작은 밑걸음이 될 수 있다는 자긍심을 가지고 나아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