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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화의료역사이야기

한국의 병원 출산 문화를 이끌어낸 릴리안해리스기념병원과 스튜어트 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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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25-02-10 조회수 920

2024년 523일 이대서울병원 내 이대엄마아기병원이 첫 진료를 시작하였다. 다양한 분야의 특화진료가 진행되고 있는 이화의료원이지만 그 가운데서도 엄마와 아기를 위한 진료에 집중하는 이화의료원의 역사는 그 뿌리가 매우 깊다.


1887년 의료 혜택의 사각지역에 있던 여성을 위한 진료공간으로 시작한 보구녀관이 1913년 릴리안해리스기념병원으로 확대성장하게 되며 당시 병원장이었던 메리 스튜어트(Mary Stewart) 의사는 산모와 태아의 안전을 위해 한국의 출산 문화를 바꾸려 노력하였다.


조선시대까지 한국의 출산은 출산의 경험이 있는 마을의 나이 많은 여성의 도움을 받아 집에서 진행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그러다 개항 이후 일찍이 산파 문화가 확산되었던 일본인들이 조선에 거주하기 시작하며 산파라는 존재가 알려지기 시작했다. 또한 근대식 병원의 출현으로 전문적인 의료인이나 산파의 도움을 받아 출산하는 것이 산모와 태아의 안전에 효과적이라는 인식이 한국인들 사이에서 조금씩 확산되기 시작하였다.


산모의 집으로 왕진을 많이 다녔던 스튜어트 의사는 늘 한국 가옥의 비위생적인 환경으로 인해 산모와 아기의 생존율이 낮아지는 것을 우려하며 위생적인 시설을 갖춘 병원에서의 출산이 필요함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렇게 한국에서 4년여를 활동하던 스튜어트 의사는 1915년 연례보고서에 다음과 같은 보고를 하였다.

 

점점 더 많은 여성들이 분만을 위해 병원을 오고 있다

지금은 우리 병원의 인력거를 타고 병원에 오지만 예전에는 의사가 환자의 집으로 왕진을 갔다.”

(Annual Report of the Korea Woman's Conference of the Methodist Episcopal Church, 1915)

 

이렇게 한국인들 사이에서 조금씩 병원 출산이 확대되어가고 있었음에도 여전히 한국인들이 출산을 위해 병원을 가는 것에 망설이게 되는 중요한 이유 가운데 하나는 비용 문제였다. 이에 스튜어트 의사는 191612월부터 무료 분만 사업을 시작하였다. 그리고 이 사업이 지속적으로 이어질 수 있기를 바라는 미국의 한 독지가가 1917년 릴리안해리스기념병원에 245달러의 기부금을 보내왔다.


이같은 스튜어트 의사의 노력 덕분에 한국인들 사이에서 릴리안해리스기념병원은 안전한 출산을 위해 갈만한 병원이라는 인식이 확대정착되지 않았을까 짐작해본다. 또한 여성으로만 병원 의료진이 구성되어 있다는 점도 여전히 남성 의사의 진료를 꺼리던 당시 여성들에게 있어서는 이 병원을 선택하는 주요 요인이 되었을 것이다.


기록에 따르면 1924년의 어느 날에는 24시간동안 릴리안해리스기념병원에서 8명의 아이가 태어나기도 하였다. 그리하여 1913120명이었던 릴리안해리스기념병원의 출산건수는 25년이 지난 1938년에 들어서 1,184명으로 약 10배 이상 증가하는 모습을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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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스튜어트 의사는 한국에서 활동하며 불임이 한국 가정의 큰 고통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난임으로 고통받고 있던 여성들을 진료해주었는데 많은 여성들이 한 달 정도 진료를 받으면 임신에 성공하는 사례들이 나타났다. 이 소식이 경성에 널리 퍼지게 되며 1914년 릴리안해리스기념병원 부인과 진료는 2,000여명에 달하였다.


이처럼 산모와 아기의 건강을 위해 전력을 다했던 초창기 의료진들의 헌신은 이후 이 병원을 이어온 이들에 의해 계속해서 이어져왔다. 이 신념과 헌신이 앞으로 이대엄마아기병원에서 더욱 활짝 펼쳐지길 기대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