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화의료역사이야기
가을 빛으로 물든 정동길에서 만난 보구녀관의 역사
2024년 10월과 11월 이화의료원 교직원 30여명은 의료원의 뿌리이며 근간인 보구녀관 시기(1887~1913) 역사를 배우며 우리가 지켜야 할 의료원의 가치와 정신을 탐독하는 보구녀관 이화의료역사학교 과정을 함께 하였다. 특히 이번 과정은 총 5회의 강의와 함께 정동 현장 답사도 함께 진행하여 실제 보구녀관이 있던 공간의 흔적을 따라가보는 특별한 시간을 가졌다.
보구녀관이 위치했던 서울 중구 정동은 개화기 근대 신문물의 집결지 역할을 하는 공간이었다. 정동은 이성계의 계비 신덕왕후 강씨의 정릉이 처음 자리했으며, 선조가 말년을 보내고 광해군이 즉위식을 거행했던 정릉동 행궁(후에 경운궁으로 개칭)이 있어 잠깐씩 역사의 주목을 받았던 곳이기는 했지만 이 지역이 한국 역사의 전면에 등장했던 때는 1876년 개항 이후의 시간이었다.
1883년 조선에 부임한 미국 공사 푸트(L.H. Foote)의 정동 입주를 시작으로 조선과 수교를 맺은 대부분의 서양 국가들은 정동에 공사관을 조성하였다. 외교관들 외에도 조선에서 선교 활동을 하기 위해 입국한 개신교, 성공회 등 선교사들 역시 대부분 정동에 처음 터전을 잡은 후 활동을 전개하였다.
특히 당시 공사관 거리(Legation Street)로 불렸던 현재 정동제일교회에서부터 경향신문사까지 이어지는 정동길을 중심으로 경운궁, 미국 공사관과 이어지는 북쪽 구역은 미국 북장로회가, 맞은편 한양 도성 남서쪽 성벽과 인접한 남쪽 구역은 미국 북감리교가 자리잡으며 학교, 병원, 고아원, 교회 등을 설립하였다. 그러나 장로회가 자리잡은 지역은 고종이 1897년 경운궁에 들어간 후 왕실 부지로 차례로 매입되어 지금은 선교 활동의 흔적을 찾을 수 없다. 그에 반해 감리교 구역은 정동제일교회를 비롯하여 교육기관이었던 이화학당과 배재학당의 영역이 아직도 유지된 채 그 역사를 이어가고 있다.
토요일에도 이어지는 병원 진료로 인해 더 많은 수강생들이 답사에 참여할 수 있도록 답사는 두 차례에 걸쳐 진행되었는데 답사가 있었던 두 번의 토요일 모두 화창한 가을 햇살을 만끽하며 정동 구석구석을 탐방할 수 있었다. 정동제일교회 앞에서 시작된 정동 답사는 감리교 영역을 집중적으로 살펴보는 시간으로 진행되었다. 한국 최초의 감리교회이자 지금도 교회 입구에 자리잡고 있는 벧엘예배당은 한국 개신교 최초의 서양식 예배당으로 예배당과 이웃하고 있던 보구녀관 간호원양성학교 예모식, 졸업식 등의 행사가 열렸던 공간이기도 하다.
현재 남아있는 사진과 지도를 통해 추정해보면 보구녀관은 벧엘예배당 뒷편에 위치했던 것으로 보여진다. 그래서 현재 정동제일교회에서 이화여고 방향으로 가는 길가 한켠에 보구녀관 표지석이 세워져있다. 무심코 이 길을 걸어간다면 표지석이 있는지도 모른 채 지나칠 수 있는 낮은 높이의 표지석이지만 이날 답사에 참석했던 참석자들은 이 표지석이 갖고 있는 무게가 결코 가볍지 않음을 느꼈다. 이날 정동을 답사하는 많은 탐방객들이 보구녀관 표지석을 주목하며 보구녀관에 대해, 그리고 이화의료원에 대해 알아가는 모습을 보았기 때문이다. 답사 참석자들 역시 보구녀관 표지석 앞에서 한국 최초의 여성 전용 병원이며 여의사와 간호원 양성의 산실이었던 보구녀관의 역할을 다시금 상기하며 지금의 이화의료원이 나아가야 할 바에 대해서도 다시 한 번 생각해보는 시간을 가졌다.
실제 보구녀관이 위치했던 곳을 좀 더 가까이 보기 위해서 이화여고 심슨기념관을 방문하였다. 1915년 준공된 심슨기념관(등록문화재 3호)은 현재 이화박물관으로 사용중이다. 이화의 역사를 소개한 상설전과 함께 특별전 ‘정동에서 피어난 문학 향기’ 전시에서 이화의 문학인과 문학작품, 이화여고 교지 《거울》의 역사를 관람한 답사 참석자들은 심슨기념관 뒷쪽으로 이동하여 보구녀관이 위치했던 곳을 살펴보며 당시의 모습을 상상해보았다. 특별히 이화박물관 학예사 선생님의 협조로 이화여고 교정 안쪽까지를 둘러보며 근대 시기 이화학당 및 보구녀관의 역할과 그 위상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는 귀한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평소 주중, 주말을 가리지않고 바쁘게 돌아가는 병원일에 허리 한 번 펴고 하늘 한 번 쳐다보기도 어려웠던 참석자들은 이번 역사학교를 계기로 모처럼 바깥으로 나와, 특별히 좋은 날씨 속에서 책 속에서만 봤던 역사의 현장을 직접 확인하고 지쳤던 몸과 마음을 힐링할 수 있었다며 소감을 전하였다.
모든 역사는 공간과 연계되어 있고 문자가 전달하지 못하는 것을 현장이 이야기해주기도 한다. 그래서 역사 이해와 현장 답사는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책 속의 글자가 미처 전하지 못한 정동의 현장이 이야기해주는 보구녀관의 이야기와 정신이 더 많은 의료원 식구들에게 전해지기를 바래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