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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화의료역사이야기

보구녀관 간호원양성학교 2대 원장 알타 모리슨

파일 특별기고_블로그_메인.jpg       
작성일 2025-02-10 조회수 9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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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오래된 사진 한 장이 있다. 해상도가 좋지 않아 사진 속 인물들의 얼굴을 모두 또렷하게 확인할 수는 없지만 입고있는 복장을 보아하니 아마도 이들은 간호사들인 것 같다. 사진 속 인물이 몇 명인지 세어보니 총 16명이다. 사진 중앙에 이 날의 주인공인 것으로 보이는 외국인 여성이 있고, 그녀를 둘러싸고 똑같은 복장을 하고 있는 13명의 여성들이 있다. 또 사진 왼쪽과 오른쪽 끝에 같은 흰색 옷을 착용하고 있는 두 명의 여성이 있다. 이들은 누구이며 어떤 날 찍은 사진일까?


이 사진은 1910년 북감리교 한국 여성 선교회 연회록에 수록된 것으로 모리슨 간호원장의 송별식(Farewell dinner)’이라는 설명이 첨부되어 있다. 사진 속 가운데 서있는 외국인 여성이 모리슨으로 보구녀관 간호원양성학교 2대 원장을 역임했던 인물이다. 기와 담장 뒤 벽돌 건물은 정동제일교회로 추정되며 이 송별회는 정동제일교회와 맞닿아있던 보구녀관 구내 마당 한켠에서 진행된 것이 아닌가 싶다. 많은 선교사들이 한국에서 활동을 하다 떠났지만 이렇게 송별연 사진까지 남겨놓은 것은 매우 드문 일이다. 그렇다면 송별연 사진까지 남기고 떠난 모리슨 간호 선교사는 어떤 인물이었을까?


알타 모리슨(Alta I. Morrison) 간호사는 1867218일 미국 일리노이주 리빙스톤카운티 폰티악에서 태어나 샌프란시스코 시립병원 간호원양성학교를 졸업하고 간호사가 되었다. 1903년부터 북감리회 국내여자선교부의 간호사로 샌프란시스코 지역에서 활동하였는데 가정방문을 통해 환자들을 돌보고 복음 말씀을 가르치기도 하였다. 그런데 이 시기 샌프란시스코는 19세기말부터 들어온 중국인, 일본인 이주 노동자들이 넘쳐나고 있었다. 1905년부터는 한국인 이민자들도 생겨나기 시작했다. 1906년 모리슨 간호사의 기록에 따르면 샌프란시스코에 60여 명의 한국인이 있고 그들 대부분은 남자라고 되어 있었다. 아마도 모리슨 간호사는 이처럼 자신이 활동하고 있던 지역의 특수성으로 인해 한국에 대한 다소간의 정보를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그러던 중 한국의 보구녀관 간호원양성학교를 이끌던 에드먼즈(Margaret J. Edmunds) 간호원장이 남장로교 해리슨(W.B. Harrison) 목사와의 결혼을 결정하며 간호원양성학교 간호원장직을 사임하였다. 이에 감리교 여성해외선교회에서는 에드먼즈 간호사의 후임자를 구해야 했는데 이 때 모리슨이 한국에 갈 것을 자원하여 19082월 한국에 도착하였다. 한국에 왔을 당시 모리슨 간호사는 41세로 결코 적지 않은 나이었기에 한국에 가는 것은 그에게 있어 큰 용기가 필요한 일이었을 것이다. 그가 이런 결정을 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샌프란시스코에서의 활동 경험이 일정 부분 역할을 하지 않았을까 추측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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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 도착한 모리슨 간호원장은 아직 한국을 떠나지 않은 에드먼즈로부터 간호원양성학교 업무에 대한 인계도 받고 한국어도 배우기 시작하며 한국 생활을 시작했다. 새로 부임한 모리슨 간호원장이 가장 시급히 해결해야 할 것은 보구녀관 간호원양성학교의 두 명의 선진 간호원인 이그레이스와 김마르다의 졸업이었다. 본래 이 두 명은 1908년 봄에 졸업을 하고 정식 간호원이 될 예정이었으나 질병과 부족한 수업 시간 때문에 예정보다 6개월 여의 시간이 지난 1908115일에서야 졸업을 하고 최초의 한국인 간호사가 되었다.


모리슨이 처음 한국에 올 때는 1년만 활동하고 돌아갈 계획이었으나 간호원양성학교와 간호업무를 맡을 후임자가 그 사이 결정되지 못했다. 그래서 모리슨 간호원장은 계획보다 조금 더 오래 한국에서 활동을 하게 되었다. 그러면서 1909년 간호원양성학교를 하루 8시간 3교대제로 운영했고 11월에는 제2회 졸업식을 주관하며 세번째 졸업 간호사 김엘렌을 배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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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개월의 근무 기간 동안 모리슨은 일반 간호, 실용 간호, 침대 정리와 목욕, 붕대감기 실습, 열병환자 관리, 관장법 등 간호원 실무 교육을 집중적으로 담당하였다. 또한 간호교육 교재로 사용하기 위해 한국어로 번역한 폴웰(D. Follwell) 의사의 강의록을 확보하고, 클라라 윅스의 간호교과서2판을 출판하며 양질의 간호원 양성교육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하였다. 이 외에도 세브란스 간호원양성학교의 책임자 에스더 쉴즈(Esther L. Shields) 간호사와 가깝게 지내며 서로의 간호학교에 강의를 하러 다니고 학생들에게 다양한 실습 환경을 마련해주고자 교환 실습을 진행하는 등 간호원양성학교 발전에 힘을 보탰다.


한편, 모리슨 원장 입국 직후였던 19083월에는 쉴즈 간호사의 주도로 대한졸업간호원회’(Graduate Nurses' Association in Korea)가 조직되었는데 모리슨도 회원으로 함께 하였다. 당시 한국에서 활동하던 간호 선교사 5[감리교 소속의 에드먼즈, 모리슨, 홀맨(Sarah Hallman), 장로교 소속의 쉴즈, 영국 성공회 소속의 라이스(Maud Rice)]으로 시작한 이 조직은 한국에서 조직된 첫번째 간호 단체로 1911년 재선서양인졸업간호부회로 개칭발전하였다.


모리슨 간호원장은 1909108월 이화학당 설립자인 스크랜튼 대부인의 임종을 지켜본 것이 자신이 한국에서 경험한 것 중 잊을 수 없는 일이었다는 고백을 남기고 191057월 보구녀관 간호원양성학교에서의 일을 마무리한 후 다시 미국으로 돌아갔다. 미국에 돌아간 모리슨 간호사는 1916101일 플로리다주 마이애미에 환자 15명을 수용할 수 있는 현대식 시설을 갖춘 사설 요양소를 개원하였다. 이후 플로리다에서 거주활동하며 평생을 독신으로 산 모리슨은 195081883세의 나이로 마이애미 자택에서 사망하였다. 그의 무덤은 가족들이 함께 잠들어있는 일리노이주 폰티악의 패티(Patty) 공동묘지에 있다.


보구녀관의 낙후된 시설, 릴리안해리스기념병원의 신축으로 인한 재정적 어려움 등의 배경 하에서도 모리슨 간호원장은 한국에서 활동하는 기간 동안 최초의 한국인 간호사 3명을 배출하였으며 좀 더 탄탄한 간호 교육 체계 마련에 공헌한 바가 크다. 척박한 땅에 와서 열정을 바쳐 일한 이같은 선교사들의 헌신 하에 오늘날의 간호 교육 체제가 세워졌음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